Profile Imageby nalri

그렇게 시작했다


 난생처음 미술학원에 발을 딛고, 원장선생님이 직접 깎아주신 기다란 연필과 엇비슷하게 토막 난 지우개를 받아들고 내 이름표가 붙은 화판에 종이를 얹어서 시키는 대로 까만 선을 식은땀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 공간을 가득 채우던 치열한 시선들, 떠다니던 음악, 그 사이로 끊임없이 사각거리던 연필 너머로 초점 없이 부릅뜬 석고상들이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꿈처럼 하얗게 입 다물고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해야 맞는지, 선을 긋는 만큼 내 머릿속에서도 그어지는 생각들은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렇게 붙잡고 있던 생각과 그 꼬리 중에서 기억나는 일부를 -그 하나하나는 참 쓸데없지만, 혹시 모아 놓으면 가치를 지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모아서 여기에 추려보았다.

 

 여기엔 스스로 질문하고 답한 내 이야기를 주절대고 있을 뿐이어서 어떤 것은 질문만, 또는 답만, 어떤 건 질문과 답이 다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여기의 이야기들은 유일한 답이 아니다. 그리기는 답이 없다. 어찌 되었든 잘 그리면 되는 거다.

 그리기뿐만 아니라 모든 게 이렇지는 않을까? 어제의 답이 오늘의 답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세상이 헷갈리고 답답해 불만 가득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답이 없는 세상, 답이 너무 많아서 답이 없는 세상에서는 답을 포기하면 어떨까? 대신 매번 변하는 답을 부르는 질문을 붙잡으면 여전히 답이 많아 자유롭고 모호해서 재미있지 않을까?

 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답을 손에 쥐고 있어야만 안심하는 이유는 뭘까? 균형이 죽음이라면 삶은 균형을 향한 끊임없는 불균형이 아닐까? 답이 없는 세상에서 질문을 안고 사는 불안한 이들이 같이 손뼉 치며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Comment 0

Prev 1 ··· 1388 1389 1390 1391 1392 1393 1394 1395 1396 ··· 1618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