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선을 사용하여 까맣게 채워라.'
맞다, 틀리다, 아니다,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누가 대신 판단해 주지 않는다. 온전히 자기 몫이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그리고, 내가 판단한다. 틀린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무한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막막함...
대상도 없이 그저 선을, 선만을 그어야 한다. 그냥 혼자 놀아보라 하는데 막상 놀려니 이렇게 놀아도 되나 싶은. 이게 맞나? 이게 무슨 짓이지? 뭐 하려고 하는 걸까?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얼마만큼 하면 끝날까? 오늘은 이것만 하나?...
긴 선, 짧은 선, 굵은 선, 가는 선, 진한 선, 옅은 선, 빠른 선, 느린 선, 직선, 곡선, 수직선, 수평선, 대각선, 다양한 위치, 기울기, 길이,... 누가 지금 내가 하는 짓을 슬쩍 엿보는 느낌에 등에서 식은땀이 주룩~.
다 하고 나서도 도중에 떠올린 생각들이 가당하기나 한지, 도대체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궁금한 것들을 어떻게 그때는 물어볼 용기조차 없었는지... 쯧쯧
어색하게 처음 선을 하나 긋는데 하얀 종이 위로 어찌나 큰 소리가 나던지, 세상에 혼자만 연필을 놀린 것 같다. 하나씩 그어지는 선으로 정신이 연필 끝에 갔다가 손가락에 갔다가 확 달아오른 뺨에도 갔다가, 돌고 돌아 나중엔 등에서 식은땀으로 맺는다. 한참 나다니던 정신이 이제 선을 따라 머무르는가 싶다가도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이걸 왜 하는 거지?’ 순간순간 괴롭힌다. 그렇게 늘어가는 선은 당장 얻을 수 없는 답을 포기한 나와 그어지는 선만 서로 마주 보게 만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강하게 잡고 느슨하게 잡고, 눕혀 잡고 세워 잡고, 팔 전체를 쓰고 팔뚝만 쓰고 손목만 쓰고, 빠르게 놀리고 느리게 놀리고, 방향을 바꾸고, 위치를 바꾸고, 이들 하나하나를 섞는다. -이미 많은 선이 지나간 종이 위로 너무 강하게 잡지는 않고 대략 종이에서 30도 정도의 각도로 연필을 세워 팔 전체를 쓰면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빠르게 놀려서 긋는다. 간격을 최대한 좁히면서 반복해서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며 서서히 여러 개의 선으로 된 면을 만들어낸다. 잡는 힘을 넣고 빼고, 속도를 달리해보고, 연필 각도를 바꿔보고,... 이렇게 하나하나 그어진 선을 보면 진한 선, 옅은 선, 굵은 선, 가는 선, 파고든 선, 얹힌 선, 긴 선, 중간선, 짧은 선, 매끈한 선, 울퉁불퉁한 선, 각기 다른 방향의 길이와 위치의 직선과 곡선을 볼 수 있다. 더욱이 수많은 선이 서로를 가로질러 갈수록 미끄러지는 곳이 있는가 하면 선이 기분 좋게 자취를 남기며 지나가는 곳도 있다. 어떤 곳은 종이가 털실처럼 일어나기도, 어떤 곳은 서로가 차곡차곡 업혀서 기분 좋은 묘한 감정을 느끼게도 한다.
연필 한 자루와 또 한 자루의 반을 선으로 바꾸고서야 멈출 수 있었던 시간을 뒤로하고 어떤 선들로 채웠는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변해버린 종이를 들고서 ‘이걸 왜 했지?’ ‘뭘 얻으려고, 뭘 얻어야 하는 걸까?’ ‘어떻게 제대로 맞게 하기는 한 건가?’ 까맣게 변한 막막함이 가슴에 걸려 버렸다.
‘왜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