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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writing/입으로그리기

by bynalri 2016. 3. 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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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까맣게 채운 종이를 하얗게 지워라.'

 

 막막함? 까맣게 채우는 것과 반대다.

 지우개로 지우는 것도 그리기다. 하얀 선을 긋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결국, 그리기는 긋기와 지우기가 아닐까?

 



 지우기도 그리기임을 곧잘 잊어버릴 때가 있다. 까만 선이나 하얀 선이나 모두 그리기다. 어둠을 찾아가는 것과 밝음을 찾아가는 것. 결국은 둘 다 이야기해야 한다.

 기회가 생긴다면 까맣게 채운 종이에 지우개를 들고서 하얀 선으로 그려보자. 먼저 까맣게 채우는 시간만 제외한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이게 훨씬 쉬웠다.


 노파심에서 하나만 덧붙이자면, 지우개가 없다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종이를 벗겨내지는 말자. 변태다. ^^




 한때 시간 내에 연필의 강도를 충분히 올리지 못하는 문제의 반복을 극복하기 위해 홧김에 저질러버린 마지막 극단적 선택이었다. 처음부터 최대치의 어둠으로 시작함으로써 아예 연필의 강도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리겠다는 생각이었다.

 오기로 시작된 이 운 좋은 우연은, 당장 마주한 문제의 해결과 더불어 연필로 바라본 지금까지의 시선과 반대로 접근해도 될 뿐만 아니라 연필과 지우개의 시선 둘 다 같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지우개는 단순한 ‘취소’가 아니라 연필과 반대의 시선을 가진 또 하나의 연필이었다.


 앞서 운 좋은 경험은 까맣게 채우기를 한 지 반년도 훨씬 넘어서인 것 같다. 까맣게 채우기를 한 후 바로 하얗게 만들지는 않았다. 순서를 여기에 이은 것은 지나고 보니 시선만 달랐지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