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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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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마음 난 책을 정독하는 편이다. 여러 번 읽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 번 막혀버리면 그게 뚫릴 때까지 넘어가지 않아서 책 한 권을 몇 년 동안 붙잡고 있는 때도 있다. 어느 날 문득... 한참 만에 다시 펼쳤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쉽게 뚫려 버릴 때가 있다. 곧 내 마음이 그동안 열렸음을 느꼈다. 그리기도 어느 순간 한 단계 도약한 시점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그렇게 고민하고 안 되던 것들이 결국 풀려서 내 것이 되어버린. 무엇보다 꽉 닫혀있던 내 마음이 열린 순간임을 느꼈다. 아니면, 열리고 나니 비로소 닫혀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야 맞나?
설득력 설득력 잘 그린 그림일수록 그에 담긴 이야기가 훨씬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자연스럽고 명쾌하며 즐거운 감동이다. 무한정 정의 내릴 수 있음에 설득력이라는 책임이 따른다. 막연함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거기서 어렵게 어설픈 근거 하나를 끄집어내고 겨우 서툰 표현을 시작한다. 확신도 없고, 이게 맞나?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은. 열심히 고민하는 지금을 믿자. 다음엔 조금 덜 어렵고 조금 덜 어설픈 근거로 조금 더 세련되어진 표현을 시작할 거다. 아무리 잘 그려도 어차피 거짓말이다. 결코, 공간에 놓인 그 대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더 그럴듯한 거짓말이 더 잘 그린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려 하고 나는 피노키오가 되려고 한다. ... 또 쓸데없는 생각.
세상 보기와 그리기 세상 보기와 그리기 누군가 말하길 세상은 자기가 아는 단어만큼만 본다고 했다던데, 아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그린다. 잘 그리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는 사람보다 대상을 좀 더 아는 것일까? 잘 그린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좋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대상을 보는 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틀린 것은 하나도 없고 무한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할지라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남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당연히 그 결과에 마음을 주지 못할 것이다. 처음엔, 얼마 알지도 못하는 -할 이야기가 얼마 없었던 내가 그 알고 있는 것만 하는데도 주어진 시간을 모두 써야 겨우 해낼 수 있었다. 그게 고작 선으로 형태를 잡아내는 것뿐이었는데도 말이다. 거기서 겨우 밝음과 어둠을 나누는 정도까지 나아갔지만, 여전히 알고 있는 것들로 채우기에 급급했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을 다 채운 다음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선을 긋지 말자. 그린 사람도 모르는 것을 보는 사람이 어떻게 알 것인가?
그린 사람을 알 수 있다? 그린 사람을 알 수 있다? 주어진 대상에 100% 내 이야기들로만 접근한다. 그래서 그리는 자신이 드러나 보인다. 동시에 그것을 남들도 본다. 무섭다. ㅜㅜ 그림을 그릴수록 예뻐져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돈 들여 성형하지 말고 그림을 그리자. 내가 그린 그림은 나를 닮는다. 신기하게도 무엇을 그리든 나를 닮았음을 느낀다. 참 부끄럽고 신기하다. 그리기만 그럴까? 내가 한 모든 것이 그것을 할 당시의 나를 닮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내가 바뀌어야 그림도 바뀐다. 그림치료라는 말도 아마 여기에서 출발했으리라.
면과 재미 면과 재미 면을 더 봐준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무슨 말인가? 뒤이어 재미라는 말도 같이 따라온다. 대체 무슨? 스스로 면에 대해서 정의 내리고 있지 않다면 이 물음에 꼼짝하지 못할 것이다. 좀 더 이야기한다는 말이고 그렇게 더해진 이야기로 인해서 풍부해졌다는 말이다. 연필을 도화지에 대고 선을 긋는다. 이를 달리 보면 연필을 도화지에 맞대고 있는 순간순간은 어디까지나 점이고, 그 점을 움직여 선을 그린 것이다. 점을 찍을 수 있고, 선을 그을 수 있다면 이를 통해서 면을 만들 수 있다. 점을 촘촘히 찍어서, 선을 촘촘히 그어서, 때로는 점을 듬성듬성 찍어서, 선을 듬성듬성 그어서, 또는 이 둘을 섞어가면서. 점이든 선이든 하나만 사용해도 면을 드러낼 수는 있다. 하지만 두 개 이상 사용하여 표현하면 상..
많은 이야기는 시선을 모은다 많은 이야기는 시선을 모은다 특정 부분에 시간을 들여 많이 그릴수록, 많이 이야기할수록 그곳에 시선을 모은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목적이 있다면 꼭 해야 한다. 특정 부분에 시간을 줄여 적게 그릴수록, 적게 이야기할수록 그곳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느껴지는가? 많은 이야기가 시선을 모은다는 게 절대적인 답은 아니다. 전체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이야기, 상대적으로 적은 이야기 둘 다 시선을 모은다. 그 상대적인 차이의 양은 느껴보는 수밖에...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 보고 - 느끼고 - 이야기하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이야기의 연속이다. 작은 이야기로 조금 큰 이야기를 만들고, 조금 큰 이야기로 더 큰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바둑 중계를 TV로 본 적이 있다. 어떻게 순서대로 다 기억을 하고 그 중간중간 다른 경우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만 했다. 그림을 완성한 후, 그 선 하나하나 모두를 되살려 복기하는 것은 어렵지만 적어도 작은 이야기 하나하나를 그려나갈 때 고민과 느낌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는 있다. 바둑 중계에서 보이는 그 신기함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대상과 나 대상과 나 무한정 정의할 수 있음에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동시에 주어진 대상을 그린다. 따라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혼재한다. 쓸데없는 소리 하나를 덧붙이자면, 처음엔 객관적인 게 좋았는데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점점 더 주관적인 게 좋아졌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유명한 영화배우 겸 감독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찰리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에 참여했었는데 거기서 3등을 했다고 한다. 똑같이 해서 3등을 했다면 1등은 똑같이 하는 것 말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더 있었을 것이다. 뭘까?
빛, 운동, 구조 빛, 운동, 구조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나 해 볼까? 잘 그린 그림들을 살펴보면 우연히 비슷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무한정 정의할 수 있음에도 '빛, 운동, 구조' 위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정말 근거가 없는지 직접 확인해 보시라. 빛을 표현하는 방향, 운동을 표현하는 방향, 구조를 표현하는 방향. 이것을 고민하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을 까맣게 헤매야 했다. 눈물이 핑~ 돈다. 그 절실함에 맞닥뜨린 황홀함. 내 개인적으로는 여기서부터 스스로 질문하고 답해가는 힘이 생긴 것 같다.